1. 베르나르 뷔페와 어머니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살기위해 그림을 그렸다."
192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베르나르 뷔페는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있었지만 외도를 하는 등 가정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에 소질이 있었던 뷔페를 보고 어머니는 그림 공부도 시켜주며 재능을 키워주었습니다. 초등학교를 중퇴하고 야간 학교에서 데생을 배워 뷔페가 15살이 되던 1943년, 프랑스 최고의 미술 학교 '에꼴 데 보자르'에 조기 입학을 합니다.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이 칭찬하며 그의 실력을 인정해주었으나, 어머니가 뇌종양으로 3개월의 투병생활 끝에 죽음을 맞이합니다. 어머니는 죽기 직전까지 베르나를 뷔페를 데리고 매주 루브르 박물관을 가서 그림을 보여줄 정도로 그에게 헌신적이였습니다. 베르나르는 그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했기에 어머니의 사망은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친구의 도움으로 시골에 내려가 마음을 치유하며 유화작업을 계속하였고, 19세에 출품한 그림이 비평가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으며 대스타가 됩니다. 피카소의 대항마가 나타났다며 사람들이 환호했고, 실제로 피카소는 베르나를 뷔페를 질투했을 정도였습니다. 일화로 피카소가 자신의 아들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뷔페가 들어오자 아들 모두 베르나르 뷔페에게 사인을 받으러가서 크게 화를 내고 레스토랑을 나왔다고 합니다.
2. 미술계의 아이돌, 베르나르 뷔페
"베르나르 뷔페는 파리에서 마지막으로 유명한 화가" - by. 앤디워홀
베르나르 뷔페의 전시전이 열리면 전시회 근처가 온통 마비될 정도로 인파는 몰렸고 그는 10대에 이미 큰 성공을 하였습니다. 뷔페의 작품들은 직선을 이루고 있으며, 사람들은 하나같이 볼품 없고 삐쩍 말라있고, 표정에는 생기를 잃었습니다. 전쟁으로 상막하고 모두가 표정이 없던 그 당시 시대상황을 적나라게 드러내는 베르나르 뷔페의 화풍은 사람들로 하여금 공감과 슬픔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비평가상을 휩쓸고 다녔고, 생로랑과 함께 프랑스를 대표하는 5인에도 선정 되는 등 시대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합니다. 일찍이 성공한 베르나르 뷔페는 20대에 백만장자가 되어 자신의 오래된 꿈이였던 성을 구입하는데, 어릴적 어머니와 자주 갔던 브르타뉴 근처 성에서 나오는 아이들을 보며 부러움을 가졌다고 합니다.
3. 베르나르 뷔페의 또다른 자아, 광대
베르나르 뷔페의 그림에는 유독 광대가 자주 등장합니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던 뷔페는 모든 사람들은 무대위에 서는 광대와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주변 사람들은 뷔페를 보고 밝고 유쾌하며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말했지만, 그는 자주 우울했고 감정의 기복도 큰 사람이였습니다. 타인에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는 일이 많아지면서, 사람들 앞에서 웃고 있지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광대를 보며 아마 뷔페는 큰 공감을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뷔페는 자신의 얼굴에 광대 분장을 하고 자주 자화상을 그렸습니다.
4. 사랑하는 나의 아나벨
"나는 당신을 원해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당신이면 돼요."
1958년 전쟁 이후 정신없는 세상 속에서 그림을 그리며 버티던 베르나르 뷔페는 사진작가 록 포넬이 사진 모델을 좀 해주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나간 자리에서 자신의 아내 아나벨 슈와브를 만나게 됩니다. 아나벨 슈와브도 뷔페와 같은 제안을 받고 나온 자리였고, 동갑내기였던 두사람은 첫눈에 반해 30살에 결혼합니다. 아나벨은 글을 쓰는 작가이자 배우였기에 아나벨이 글을 쓸 때면 뷔페가 그림을 그려주고, 뷔페가 전시를 열때면 아나벨이 글을 써주었습니다. 둘은 천생연분이였고, 그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뷔페는 매일 작업실에 가서 그림을 그렸는데 오직 단 한사람, 아나벨만이 그의 작업실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베르나르 뷔페는 아나벨 그림만을 모아 전시를 열정도로 아나벨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아나벨이 없었다면 뷔페는 30대에 이미 자살했을 거라는 말이 나올정도였습니다.
5. 추상 미술의 성공, 추락하는 뷔페
베르나르 뷔페를 구분하자면 표현주의 화가였으며, 형태가 있는 사물과 사람을 그리는 구상화가 입니다. 전쟁이 끝나고 추상미술과 다초점 다각화의 시대가 열리며 사람들은 뷔페에게 추상을 왜 하지 않냐며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평을 내놓습니다. 또한, 기업과의 콜라보를 자주하던 베르나르 뷔페는 이제 주문이 들어오면 그림을 그리겠다는 의사를 표명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상업적으로 변했다며 비난합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화가인 동시에 그 누구보다 빨리 추락한 베르나르 뷔페는 사람들에게 끝임 없는 질타를 받게 됩니다. 그가 구입한 성과 롤스로이스를 보며 사람들은 사치스럽다며 욕하기 바빴지만, 베르나르 뷔페는 묵묵히 그 어둠의 시간을 그림과 함께 견뎌냅니다. 아나벨은 옆에서 말없이 그의 곁을 지켰습니다.
6. 베르나르 뷔페의 자살
"나는 넓은 배를 항해하는 한 척의 작은 배와 같다."
베르나르 뷔페는 하루도 빠짐 없이 그림을 그릴정도로 성실합니다. 그런 그에게 '파킨슨 병'이라는 시련이 찾아옵니다. 그림을 그릴 때마다 손이 떨려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없을 정도가 되자자신의 팔목을 잡고 그림을 그려나갔습니다. 파킨슨병 진단을 받고 얼마 안있어 그림을 그렸는데, 그 작품이 <베르타뉴의 폭풍>입니다. 베르타뉴는 어릴적 뷔페가 어머니와 함께 찾았던 곳이고 어머니가 그리울때면 자주 그렸던 풍경화입니다. 항상 밝고 어딘가 모르게 아련했던 그 풍경이 이번에는 조금 달랐습니다. 아나벨은 그 그림을 보고 베르나르 뷔페가 자살할까봐 놀라 집안에 있는 모든 날카로운 물품을 숨겼다고 합니다. 자신을 배에 자주 비유했던 뷔페가 침몰하는 배를 그렸기 때문입니다. 아나벨은 나중에 회고할때 아마 베르타뉴의 폭풍을 그렸을 때 이미 죽기를 결심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습니다. 죽기 직전 베르나르 뷔페는 전력을 다해 그려낸 <죽음> 시리즈 24점을 내놓았고, 자신의 아들에게 그 모습을 비디오 카메라로 찍어달라고 하였습니다.
평화롭던 어느 아침, 여느때와 같이 아나벨과 아침을 먹고 산책을 나선 뒤 성모마리아상에 장미 한송이를 놔두고 베르나르 뷔페는 자신의 작업실에서 비닐봉지를 쓰고 질식하여 숨을 거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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